설익은 수박을 보면
이 정 자
우리 동네 입구엔 큰 팽나무가 지금도 있다. 울타리 안엔 구멍 숭숭한 돌담으로 길게 포개놓은 골목을 종종걸음으로 다니던 시절, 바로 우리 앞집에 같은 학년의 토니가 살고 있었다.
사방이 어스름 해져도 밭에 가신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신작로 어귀 담 벽에 기대어 부모님을 기다렸는데, 정수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럼없이 마주 서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어느 날, 정수는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했다. 처마위에 둥지를 튼 어미 제비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면 재잘거리는 노란 입모양이 너무도 재미있다고……. 별일도 아니다 싶어 무심코 제비둥지를 쳐다보며 놀고 있는데 옆 집 정수 친구가 왔다.
그 친구가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서 논다며 소문을 내는 바람에 우린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마주칠 때마다 돌담 한 쪽씩 등에 진 듯 양쪽으로 걷곤 줄달음을 쳤지만 가끔은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어느덧 5학년 여름 방학, 찰흙 공작 숙제가 있었다.
나는 민속자료인 절구를 정성들여 만들고는 그늘진 조심스럽게 말려도 금이 가면서 깨지곤 했다. 답답한 나머지 화해도 할 겸, 정수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문제는 흙에 모래가 많았던 거였다. 마을 오름에 있는 소낭굴 찰흙이라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둘이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찰흙을 구하러 나들이 갔다가 냇가에 들러 멋진 절구를 만들었다. 반나절 이 넘도록 단둘이만 함께 지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니는 할 말이 있는 듯, 돌담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나 있지, 2학기부터는 제주시로 전학 갈 거.”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다시 이별이라니. 그렇게 생이별을 했건만 자꾸만 정수가 보고 싶었다. 제주시에 사는 사람들도 부러웠다.
오년이 지났을까 무더운 여름 날, 정수는 대학생이 되어 방학기간이라며 우리 동네 고모 댁에 왔는데, 아무도 안 계셔서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우리 집에 왔으니 나더러 밥을 달라는 것이었다. 황당하고 당황했지만 반가움에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주었더니 맛있게 먹는다. 객지에서의 생활, 미팅에서 만난 여대생 이야기, 아마존 밀림에 사는 여 전사인 시골 처녀 생각이 나서 더 이상 미팅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활짝 웃었다.
너랑 나랑은 동창이지, 이성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속마음을 감추었다.
동네 초등생 동창들이 정수네 집으로 찾아왔다. 마침 보름달이 뜬 밤이라 마당에서 놀다가 남자들은 수박 서리하러 가자는 모의를 하게 된다. 남자 넷이서 당당하게 어깨를 흔들며 출동했고, 여자들은 설마 하면서 기다리는데 수박을 세 덩이나 따온 것이다. 한사람은 망을 봤다며.
남자들은 근육미를 자랑하며 주먹으로 수박을 내려쳤는데 정수가 따온 수박은 풀 냄새가 물씬 나는 설익은 수박이었다. 수박 고르는 솜씨가 없다는 나의 유별난 핀잔에 대답대신 외국영화 ‘나자리노’의 주제곡을 멋지게 불러주었다. 노래 솜씨에 그만 가슴이 뜨거웠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물질로 청춘을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생모가 사는 부산 영도를 찾아갔다.
출렁이는 고향 바다는 성공해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새 희망을 설계하면서 나름대로는 야무지게 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정수.
해양학과 출신답게 오대양 육대주에 미래를 펼쳐가는 주인공이 되겠노라며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며 다짐하는 정수. 나는 무심한 척 듣기만 했다. 일류대학 출신이기에 마도로스가 되어 외국을 넘나들 정수. 시골 여고 출신인 나. 생각이 많았다. 아마 이런 경우가 있기에 연애 잘 하는 남자들은 나중에 대답해도 좋다고 한 걸까. 묻는 말에 마지못해 대답했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불쑥 화를 내며 항상 누님 같은 말만 한다며 무안을 주고는 상기된 얼굴로 그냥 가버렸다.
또 황당했지만 허공에 미안하다고 독백을 하고 무진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니로 부터 교제하던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가 왔다.
바로 토니 고모님의 아드님이라니. 정수의 외사촌 형이다.
며칠 뒤 언니로부터 용두산 공원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들뜬 가슴을 억누르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내 마음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캔 맥주를 따라 마시고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언니 네와 우리 따로 산책을 하였다. 정수도 심각했다. 그 멋진 노래라도 들었으면..., 침묵이 무척 흐른 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너 네 형님과 우리 언니가 결혼한다며. 결혼이라는 대목이 얼굴을 달구는 것 같아 비둘기가 구구대는 곳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렇게 언니 결혼식장에서 만난 정수에게 “어마, 사돈님.” 하며 과잉 친절을 베풀었더니 정수도 쑥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애써 웃으며 손을 내밀고는, “그래, 우린 동창이며 나의 영원한 누님.”
가끔 화장대 앞에 있으면 설익은 수박이 생각난다. 그때 설익은 수박 대신 잘 익은 참외를 따주겠다고 남몰래 불렀다면 어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