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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학에 보낸 글

샛년 2009. 11. 18. 22:01

수필

내복(內服)

외 2편

이정자

겨울의 길목이다. 조석으로 찬바람 달린다. 시골에 계시는 친정 부모, 동생 얼굴이 떠오른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아들에게 제주도 꽃 소식을 전한지 어제 같건만 어느덧 단풍 소식을 듣게 되니 몸은 길 잃은 제비마냥 바다건너 줄달음친다.

오늘 방송에서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요즘 신종 플루 때문에 백화점 인기품목은 겨울 내의란다. ‘내복은 몸의 일정한 체온을 유지시켜줄 뿐 아니라 최소 3도 이상의 보온 효과가 있어 건강을 지켜준다.’ 는 전단지가 기특하다. 내복을 부모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많아졌기에 온정이 묻어나는 소식이다.

어릴 적, 형제들과 뒹굴던 친정집 안방이 뇌리에 펼쳐진다. 시골에 있는 친정집은 북풍한설이 불어오면 바닷가라서 염분 때문에 울타리에 사는 동백나무 가지마다 하얀 꽃눈을 틔우곤 했다. 어머니는 반농반어 일을 잠시 접으시고 밤마다 바늘 쌈지를 풀어놓고 헤진 빨간 내복을 기우셨다.

3남5녀의 대 가족이다. 언니 내복을 동생에게 대물림해도 우리는 불평이 없었고 당연히 물려받고 입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어머니가 바느질하는 동안 우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대면서 수수께끼나, 실을 길게 잡고 끓어 당기며 튕기는 놀이를 했다.

장난이 지나쳐서 울다가 싸움이 발발되면 어머니는 화해의 무기로 잘 삶은 고구마를 꺼내어 나눠 먹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할머님이 입었던 낡은 스웨터를 풀기 시작 했다.

푸는 실을 돌돌 말더니 화롯가에 큰 주전자를 올려놓고 김이 피어나는 주전자 코에다 실을 통과시키며 꼬불꼬불 휘어진 실 가락을 폈다.

실 풀어내는 일이 거의 끝 나가는데 나도 해본다고 풀어내는 실을 만지다가 그만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엎질렀다. 옆에 앉아있던 막내의 허벅지에 그만......., 대성통곡을 진정시키느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매를 맞는 곤욕을 치렀다. 지금도 막내의 허벅지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 가끔 나보고 성형 수술을 해달라고 하면 “사랑하는 막내야, 너는 내 동생이라는 증표를 새겼으니 얼마나 좋으냐?” 고 횡설수설한다. 사랑의 묘약 앞에서 정이 도타운 막내가 정말 아깝다.

나도 내의를 선물 하는 일이 보편화 되었던 70년대 후반에 직장에 들어갔었다.

고향을 등지고 바다 건너 달려간 곳은 항구 도시 부산.

대망의 꿈을 안고 부산 영도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첫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로 월급봉투가 젖었다.

우선 고향에 계신 부모와 외할머님, 동생들 모두 내복 열 한 벌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백화점으로 달려가 고급 내복을 골랐는데 현금이 턱 없이 모자랐다. 아무리 사정해도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쉬웠지만 남포동 시장에서 샀다. 난생 처음 고향으로 한 아름 소포를 붙이고 지갑을 열어보니 동전만 몇 개 남았다.

영도다리를 건너오면서 마음속으로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흥얼거렸다.

내복을 선물한 덕분일까? 인정 많은 직장 동료들 덕분으로 객지 생활의 어려움은 못 느꼈지만 향수병으로 마음이 피폐해졌다. 일년 육 개월을 못 넘기고 귀향을 서둘렀고 중매로 만추의 계절에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기에 나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예쁜 내복을 선물하는 친지나 형제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며 가계부 뒷장에 기록했다.

큰 아들이 학업을 마치자마자 특채로 직장에 입사하고 첫 월급을 받아왔다.

내복을 선물할 것을 권장했다.

네가 크는 동안에 많은 친지들이 내의를 선물해 주었으므로 너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첫 월급을 내복 선물로 정하면 좋겠다하니 아들도 기꺼이 찬성했다.

친지들의 이름을 적으며 선물 내복은 28벌, 28명의 반가운 얼굴들이 눈앞에 서 미소 짓는다.

아들의 앞날에 풍파를 막아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선물로 따뜻하고 포근한 내복이면 좋겠다.

겨울엔 가계부에 난방비(가스) 지출을 기재하기가 두렵다. 요즘은 내복도 패션이다. 올 겨울엔 얇고 부드러운 내복으로 몸매를 지키고 추위도 이겨내야지.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는 가족들 내복을 꺼내어 톡톡 털어내며 온기를 불어넣자.

가까운 시일에 부모님의 건강한 겨울나기를 위하여 내복을 사 드려야겠다.

아마도 내복을 내의라 하지 않는 뜻은 속옷이 아니고 겨울나기에 건강을 위하여 갖춰 입는 양복이라는 뜻이리라.

문패를 달고

이정자

매서운 추위가 엄습해온다. 년 중 제일 추운 달, 북풍한설이 후려치는 음력 섣달. 입춘 전후하여 제주도 사람들은 집중적으로 이사를 한다. 이때가 되면 옥황상제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받기 위하여 제주의 일만 팔천 신들이 하늘나라에 일주일 정도 올라간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간을 신구간이라고 부른다. 선조 대대로 이어지는 풍습을 따르는 후손은 추워도 마음은 편하다.

지금껏 이사를 일곱 번이나 다녀도 신구간을 지켜서인지 후탈이 없다. 이사를 하는 동안 귀신들도 감기 걸리기 딱 좋게 눈발이 휘날리는데 이삿짐을 옮기다보면 눈이 수북이 쌓일 때도 있다.

네 번째 이사를 앞두고 처음으로 아파트를 마련했다. 번듯한 문패를 달아 놓기가 쑥스러운 작은 아파트였지만 주변 환경이 너무도 아름다운 동네였다.

아파트를 계약하고 온 날에는 들뜬 마음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자축 파티를 하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박수를 치다보니 너무나 행복했다. 아이들도 우리 집인 줄 알고 한껏 즐겁게 뛰어논다.

1986년 섣달 스무 나흘. 새벽 5시가 되었으니 솥단지를 들고 가야한다는 시아버님의 지시에 따라 큰 보자기에 성냥. 밥솥. 요강을 싸들고 팥. 소금을 주머니에 넣고 매서운 공기와 입씨름하며 30 분여를 걸었다. 현관문을 열어 제치고 천신과 지신을 향하여 팥과 소금을 뿌렸다. 밥솥에 밥을 짓고 식탁에 올려놓으니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의 잡귀를 물리치며 주인이 바뀌었음을 선언했다. 이윽고 먼동이 트고 겨울 햇살이 거실에 들어선다. 첫 번째 반가운 손님이었다.

살림살이를 정리하는데 2년 전에 구입한 칼라TV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옮기면서 누군가의 부주의로 브라운관이 터졌다. 당황한 마음이 앞서서 친정어머님께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큰 액운을 물리쳤다라고 생각하라며 안심을 시켜 주셨다. 어머님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수호신이다.

집안 정리를 하면서 벽면에 못 질을 하는데 시어머님 얼굴이 어른거렸다.

시어머님은 결혼3년 되는 해에 췌장암과 싸우며 나에게 유언을 남기셨다.

“큰 며느리야! 면목 없다. 죽어서 혼이 있으면 너희들을 도와주마.”

철부지였던 며느리는 훌쩍거리기만 했을 뿐 대답을 드릴수가 없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집도사서 잘살아가겠습니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마음속으로 시어머님께 맹세하고 실천에 옮겼다. 힘든 일이 닥치면 저승에 계신 어머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용기와 힘이 불끈 불끈 생겼다. 두 아이의 재롱을 보며 장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아파트 위치는 고산 동산(지금은 지방 법원 앞)이지만 새로 택지 개발된 지역이라 소나무가 울창했고 유채 밭과 보리밭도 공원처럼 남아 있었다. 뒤쪽으로는 묘도 많이 있었지만 그만큼 명당이란 생각에 무섭지가 않았다.

눈이 하얗게 쌓였던 밭에서 아지랑이가 하품을 하면, 파릇파릇 올라오는 딸기밭의 정기는 벌 나비가 찾아오는 천혜의 학습장이 되었다. 장마철이면 아파트 가까이 습지에서 맹꽁이 소리가 아이들을 유혹하였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집안일을 할 수 있는 행복은 저녁 찬 거리가 없어도 행복했다. 남들보다 큰 행복을 소유했다는 착각으로 항상 감사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시댁에 갔더니 주인 잃은 ‘재봉틀’이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님은 재봉틀로 당신의 작업복들을 만들어 입으셨고, 장손에게 이불과 요를 만들어 포근히 감싸주었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 떠나면서 입을 상복들은 일가친척들의 손에 의해 재봉되어지고 그 후엔 재봉틀만 외롭게 남겨진 것이다.

맏며느리 특권으로 재봉틀의 주인이 되고 보니 매사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재봉틀로 아이들 옷이 떨어지면 수선하여 입혔고, 작은 소품도 만들며 조금씩 생활도 안정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보람된 일들도 많이 생겨났다.

12년간 4층 계단을 뛰어다닌 덕분으로 식구들은 다리가 튼튼하다. 벌써 그 아파트의 아늑한 보금자리와 이웃을 뒤로하고 떠난 지도 10년이 넘었다.

첫사랑처럼 다시없기에 그리운가, 더 좋은 집에 살고 있건만 사계절 변화가 뚜렷한 그곳의 풍경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도 거실 앞에 시어머님 유물인 고물 재봉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장식 대 위엔 할머님과 시어머님이 사용했던 녹밥주걱. 나무국자. 남 죽. 절편. 솔 변. 기름떡 본 등, 골동품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후손에게 물려줄 유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 진가를 발휘하며 집안의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 집엔 부부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