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내복(內服)
이 정 자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달려든다.
시골에 계시는 친정 부모님 모습이 어른거리고 형제자매들 얼굴이 떠오른다.
북풍이 달려오면 서울에 있는 아들 녀석들 생각으로 마음은 훨훨 산을 넘고 바다건너 멀리멀리 줄달음친다.
오늘 방송에서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요즘 신종 플루 때문에 백화점에서 제일 많이 매상되는 품목이 겨울 내의란다. ‘내복은 몸의 일정한 체온을 유지시켜줄 뿐 아니라 최소3도 이상의 보온 효과가 있어 따뜻하게 건강을 지켜준다.’ 내복을 부모님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지만 온정이 묻어나는 소식이다.
어릴 적 형제들이 뒹굴던 친정집 안방이 스크린에 올라왔다.
시골에 있는 친정집은 북풍한설이 불어오면 바닷가 짠 염분이 초가집 울 터에 있는 동백나무 꼭대기를 하얀 면사포로 씌우곤 했다. 해와 벗 삼아 물질을 하고 농사일을 하시던 어머니는 찬바람이 불어 올 때면 밤마다 바늘 쌈지를 풀어놓고 헤어진 빨간 내복을 기우셨다.
친정은 3남5녀의 대 가족이다. 언니 내복을 동생에게 대 물림하여도 우리 형제들은 불평이 없었고 언제 물려 입을 것인지 기다렸던 것이다.
어머니가 바느질 하는 동안 우리들은 서로의 몸을 비벼대면서 수수께끼 놀이나, 실을 길게 잡고 둘이서 끓어 당기며 튕기는 놀이를 했다.
서로 웃다가 울다가 싸움이 발발되면, 어머니는 화해의 무기로 계란 크기만 한 고구마를 꺼냈다.
한참 울어대던 막내가 배시시 웃으면 언니들은 “ 울던 장콜래비(개구리) 왜 웃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뜻도 모르면서 꼬마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어머니가 할머님이 입었던 낡은 스웨터를 풀기 시작 했다.
푸는 실을 돌돌 말더니 화롯가에 큰 주전자를 올려놓고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주전자 코에다 실을 통과시키며 꼬불꼬불 휘어진 실 가락을 펴놓았다.
실 풀어내는 일이 거의 끝 나가는 순간에, 어머니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 나도 해본다고 풀어내는 실을 당기다 그만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엎질렀다. 옆에 앉아있던 막내 동생의 허벅지에 그만… 토끼눈으로 엉엉 울어대는 동생을 달래느라 나는 기진맥진 했었다. 지금도 동생의 허벅지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 가끔 동생이 나보고 성형 수술을 해달라고 하면 “사랑하는 아시야 너는 나의 동생이란 도장을 꾹 눌렀으니… 영원히 사랑해” 사랑의 묘약 앞에서 약해지는 동생이 정말로 아깝다. 형제간의 우애는 어릴 적 한 방에서 서로 살결을 맞대고 비비던 체온 덕분으로 찰 떡 궁합이 아닐까?
내복선물內服 先物
사회 첫 발을 디디고 직장에 들어가 첫 월급을 받으면 가족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내복”을 선물 하는 일이 보편화 되었던 70년대 후반에 직장에 들어갔다.
고향을 등지고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달려간 곳은 항구 도시부산.
대망의 꿈을 안고 부산 영도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첫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이 봉투에 구멍을 내었다.
우선 고향에 계신 부모님 내의, 외할머님내의 동생들 모두 열 한 벌이 필요했다.
월급봉투 통째 들고 백화점으로 달렸다.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내복을 골랐는데 현금이 턱 없이 모자랐다. 아무리 사정해도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삼키며 남포동 시장에 가서 흥정을 했다. 고향 앞으로 난생 처음 한 아름 소포를 붙이고 지갑을 열어보니 동전만 몇 개 남았다.
영도다리를 건너오면서 마음속으로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한참을 불렀다. 어디선가 커다란 갈매기가 날아와 머리위에서 빙빙 돌며 나의 마음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었다.
내의를 선물한 덕분일까? 인정 많은 직장 동료들 덕분으로 객지 생활의 서러움은 없었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병 때문에 괴로웠다.
객지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만추의 계절에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나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예쁜 내복을 선물하는 친지나 형제들에게 따뜻한 고마움을 가슴에 담고 가계부 뒷장에 기록했다.
큰 아들이 작년에 직장에 입사하고 첫 월급을 받아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크는 동안에 많은 친지들이 내의를 선물해주었다. 너도 보답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첫 월급을 몽땅 털어서 선물했으면 좋겠다하니 아들도 기꺼이 찬성 하였다.
친지들의 얼굴을 그리며 골라낸 내복 위에는 28명의 반가운 모습이 나타났다.
아들의 인생행로에 풍파를 막아줄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선물은 “내복 선물”이면 좋겠다.
겨울이 되면 가계부의 지출 란에 난방비(가스)기재 하기가 무섭다. 요즘은 내복도 패션이다. 올 겨울에도 얇고 부드러운 내복으로 추위를 이겨내야지.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는 가족들 내복을 꺼내어 톡톡 털어내며 온기를 불어넣자.
가까운 시일에 부모님의 건강한 겨울나기를 위하여 도톰한 내복을 구입하고, 따뜻한 마음 보자기에 꼭꼭 눌러 담고 훈훈한 사랑을 전 하리라.
2009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