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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샛년 2011. 8. 9. 18:15

그림자

오 승 휴

몇 부부가 오랜만에 모인다. 후배가 마련한 저녁초대 자리다. 모임장소에 나가보니 다 나와 있다. 약속시간엔 늦지 않았지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다. 평소 ‘굼뜬 녀석’이라는 말을 듣다시피, 오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우리가 참석하면 어색하지 않겠냐면서 주저하는 아내에게 신경이 쓰였었는데.

함께 근무했던 옛정 때문일까, 아니면 부부동반이어서 그럴까. 정갈한 음식 맛처럼 선후배 모임 분위기가 꽤 맛깔스럽다. 요즘 아내 눈치 보기 십상인데 다행이다. 젊었을 땐 아내가 그림자처럼 나를 쫓아다녔지만 이제는 그 반대이니 어쩌랴.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술자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늘 그러하듯 세상사(世上事) 모두가 얘깃거리다. 제 아들딸 자랑에서부터 웃음꽃이 피어난다. 부인들은 집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고 그러는가 보다.

“당신 멋져!”

건배구호가 합창하듯 방안을 흔든다.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는다. 때를 놓칠세라 그 후배가 옆에 앉은 자기 아내를 ‘그림자 같은 여인’이라며 치켜세운다. 정감 있게 말하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요사이 아내를 생각하면 절로 힘과 용기가 솟는다고 했다.

그 후배는 인간관계가 넓고 후덕한 친구다. 맞벌이 부부인데 올봄에 승진발령을 받았다. 금융기관의 꽃이라는 영업점장으로. 주위의 부러움 속에 직장동료들의 축하를 듬뿍 받고 있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술잔에 풀어내는 얘기가 출렁출렁 마음에 와 닿는다. 귀가 솔깃해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연이다.

그는 남편 뒷바라지에 매달리는 아내가 고맙고 미안해 늘 부담을 갖고 있었다. 승진도 몇 차례나 뒤로 밀려왔었다. 그런 어느 토요일, 본부에 근무하는 고향출신 선배가 내려와 그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평소 존경하는 선배가 아닌가. 쉬는 날이라 마누라가 차를 태워다주어 고마웠다. 선배를 만나 일을 끝내고 밖에 나와 보니 아내는 차 속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가 ‘저 여인이 누구냐’는 물음에 그의 아내라고 소개했다.

“너무나도 보기 좋네요! 그림자처럼.”

그 선배의 과찬이 무척 쑥스러웠다.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했다. 자기 마누라도 독서를 즐기는 편이어서 기다리는 시간이면 책을 읽곤 하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워 결혼까지 하게 됐다나. 그림자처럼 늘 소리 없이 내조하는 마누라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몸과 마음에 평안(平安)을 안겨주는 마누라는 ‘삶속에서 남자의 집’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선배도 쑥스러웠는지 살짝 웃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서울에서 ‘참 부럽다’는 동료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잉꼬부부로 소문이 파다하다면서. 승진됐다는 소식도 함께 온 거였다.

그림자 같은 아내라! 선배의 칭찬에 자신을 새삼 둘러보고, 부부 관계를 깊이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둘이지만 하나처럼 함께하는 둘이요, 동전의 양면처럼 따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인 빛과 그림자라는 걸.

“그 그림자, 참 멋지다!”

맞장구에 어우러진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했다. 그림자하면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던가. 선입견이 문제였다. 용케도 아름다운 그림자를 보고서 자신을 발견한 그 이야기. 얼마 전 읽은 그림자 ’만평(漫評)’이 떠올라 나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림자는 참 대단하다.

별 볼일 없는 사람 뒤에서 한평생 늘 낮은 자세라니.

빛과 함께하는 그림자. 그림자는 언제나 겸손하다. 빛이 찬란할수록 그림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먼저 앞질러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를 낮추고 사는 게 바로 그림자다. 평생을 그리 살지만 불평을 말하지 않는다. 그림자는 빛의 반려자요, 내조자(內助者)다.

누구나 자기중심으로만 살다보면 망각의 늪에 빠져 자신을 잘 모르고 살 때가 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 자신이 하찮아 보이고 삶이 버거워지며 비참해진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럴 때는 생각해 보라는 그 그림자! 그림자를 보고 세상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게 새롭게 보이고 삶의 의욕도 강해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 비움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일 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녘하늘에 달이 밝다. 바람이 살랑거리자 가로수 그림자가 한들거린다. 달그림자도 봄이다. 움츠려들게 했던 겨울은 간곳없고, 밤길 산책객들의 옷에서도 봄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젊은 연인들의 그림자 또한 다정해 보인다.

나도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을까. 아내가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2011.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