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보낸글
은방울꽃 계단
이정자
아름다운 인연인가, 고재종 시인의 눈부신 시를 만났다. 제목은 ‘은방울꽃 계단’, ‘-오솔길의 몽상 7’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풀과 나뭇잎을 갉아먹고 사는 척확과(尺蠖科)에 딸린 나비의 유충인 자벌레 한마리가 부지런히 몸을 접었다 펴면서 나리과(百合科)에 딸린 다년생 풀인 은방울꽃대를 재며 오른다.
시인 역시 오체 투지하는 마음으로 서산 마을 개심사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개심사는 충남의 4대 사찰 중의 하나로 의자왕 14년(651)년에 창건되고 고려 충정왕 2년(1350)년에 처능대사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개명한 절이다.
인연의 굴레로 마음의 수천 계단을 헤며 쉬고 있는데 솔숲 터져 부신 햇살 속에 자벌레가 쉬지 않고 은방울꽃대를 기어오른다. 개심사 불전으로 향한 발걸음인가. 접고 펼 때마다 은방울꽃 초롱 하나씩 작은 소리가 울려나는가.
시인은 여태 마음이 무거운가 보다. 돌계단 딛고 오르고 올라도 정작은 염전에서 물을 퍼 올리는 수차 (水車)를 밟아대는 양 얼굴 가득 땀으로 범벅이 되어 짜디짠 소금만 핥을 뿐이다. 자벌레는 무슨 환히 열린 마음이 있어 꽃대를 재며 오르며 은방울꽃 향기 한 초롱씩 퍼뜨리는가.
퍼뜨려선 지친 마음의 계단을 영롱 이슬 반짝이게는 씻을지라도 시인의 이름은 시지프스의 고역이라고 스스로 한탄한다.
아시다시피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한 나라의 왕이다. 그는 병에 걸리자 자신을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는 헤르메스를 잡아서 감금시켜버린다. 때문에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인 헤르메스가 일을 못 하게 되자 죽어서 저승으로 가야할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지 않고 계속 살게 되는 혼란이 발생한다. 그러자 분노한 제우스가 그를 잡아서는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내린다. 정작 바위를 산의 정상에 올리는 순간,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린다. 시지프스는 인간 세계의 끊임없는 고통을 상징하는 형벌인 ‘시지프스의 고역’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서인가, 나뭇잎인지 나무 그늘인지 이윽고 보이는 것조차 비몽사몽인데 시지프스가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기 직전처럼 은방울꽃대가 반달로 휜다. 그 순간, 은방울꽃 초롱 죄다 흔들리고 주위에 향기란 향기는 자욱하다. 웬걸, 뜻밖에도 맨 끝의 은방울꽃을 따 안고 땅으로 나뒹구는 자벌레. 시지프스도 그랬으리라. 그 안쓰러운 마음 계단엔 모든 것들이 절망으로 바르르 떤다. 이 막막한 원점, 그러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마음의 적요.
쳇바퀴처럼 빙빙 돌아가는 세상사 힘들다. 바쁜 와중에 내가 다니고 있는 불법도량 신도회에서 일일 사찰 순례 모임에 참가했다.
오래 만에 만나는 도반들의 반가운 모습에 초발심으로 합장하며 가슴에 새겨진 서원을 발원했다.
빗방울이 실지렁이처럼 차창을 기어 다니는데 검푸른 바다의 풍광은 쓸쓸하다.
한림공원에 첫 발을 내딛었다. 제주도를 사랑한 선각자가 십만 여 평의 황무지 모래밭에 야자수 씨앗과 해송을 심고 인간의 혼을 심었다. 울울창창한 수목이 후줄근히 비에 젖는데도 미소가 넘쳐나는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잠시 꽃이 되었다. 한라산을 솟아나게 하려고 땅 속으로 흐른 용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쌍용 동굴. 그 신비로움에 나도 모르게 합장하고 반배를 드렸다.
점심 공양하고 산방산으로 향했다. 산방산은 본래 한라산 정상인데 화산으로 뽑혀 한라산의 방산(方山)이라는 뜻으로 산방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인하여 한라산 정상에 흰 사슴이 목을 축이는 산정호수가 생겨났기에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방산에는 산방사. 보문사. 적멸보궁인 산방굴사가 취병암(翠屛巖) 깊이 안주하고 있다.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산방굴사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쉬엄쉬엄 올라갔다. 마치 많은 자벌레가 혼신을 다해 올라가는 모습이다. 저 마다 가슴에 지닌 원력, 한 계단 한 계단 솔향기가 번진다. 해송 사이로 보이는 잿빛 바다. 해수 관세음 보살님의 치마 자락인가. 시지프스의 고역인 양, 땀을 쏟으면서도 조상님의 극락왕생을 염불하고, 가족의 건강을 발원한다. 산방굴사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도 은방울꽃 향기처럼 맑다.
산방산을 뒤로하고 대평리 ‘주상절리( 柱狀節理)’를 찾았다. 주상절리는 마그마가 냉각 응고하는 동안 부피가 수축하여 생긴 다각형 기둥모양의 암반(巖盤)이다. 대칭으로 탑을 이룬 맥반석 바위는 볼수록 신기하다.
세찬 파도에 수수만년,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운명은 부조리의 대명사인 시지포스가 기어오르는 산허리처럼 보이지만 그 바위들은 바다를 이긴 고역이기에 제주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은방울꽃대로 향한 자벌레가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며 숲을 은방울꽃 향기로 채우 듯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불자가 되고 싶다.
유채꽃 피는 고향
이 정 자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았다. 해안 도로를 혼자 걷는다. 반짝이는 햇살과 바닷바람에 마음이 상쾌하다. 길 따라 노란 유채꽃이 한들거리며 반긴다. 길옆 보리밭에도 봄 물결이 출렁인다. 벌 나비를 유혹하는 유채꽃 향기가 발길을 아스라한 유년으로 데리고 간다.
누구나 힘든 시절이었다. 늦봄에 돌담 너머로 유채꽃이 춤추면 경제작물인 유채 수확이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유채농사와 씨름하기 바빴다. 해를 벗 삼는 농부의 딸로서, 나도 집안 일손을 돕느라고 학교 결석이 많았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는 농업이 주산업이었다. 농촌에서 부자는 밭에 작물을 얼마나 많이 재배하느냐로 구분했다. 유채도 환금작물이었다. 기계화가 안 된 시절이라, 일이 많았던 친정 부모님은 일손이 늘 모자랐다. 고사리 자녀들까지 밭일을 거들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물론, 학교 갔다 와서도 밭일을 도와야 했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어 질색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밭이랑에 앉아서 땀을 흘리면서 ‘어른이 되면 절대로 농사짓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한숨으로 허공에 쓰곤 했다.
유채는 늦가을에 파종한다. 차가운 땅속에서도 잡풀을 헤치며 쑥쑥 자란다. 초봄부터 늦봄까지 온 식구가 땀을 흘리며 유채 씨가 많이 수확되기를 고대한다.
유채꽃 필 무렵이면 반가운 트럭이 마을로 들어선다. 벌통을 가득 싣고 양봉 아저씨들이 우리 부모님을 찾는다. 우리는 신작로 옆에 큰 유채 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밭에 벌통을 내려놓으면 좋은 일인 듯 어머니는 무척 기뻐한다.
유채꽃이 만발하면 아지랑이가 아물거린다. 양봉 아저씨들이 까만 면사를 쓰고 꿀을 뽑는다. 호기심에 돌담에 기대어 구경하다보면 화풀이로 벌이 달려들어 내 얼굴에 침을 쏘기도 한다. 아파서 울었다. 양봉 아저씨는 따끈한 꿀을 종기에 따라주면서 나를 달랜다. 할머님은 따뜻한 오줌을 발라주고는 빨리 낫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우셨다.
유채꽃이 지고, 양봉 아저씨들이 내년을 기약하며 떠나가면 유채 수확시기가 된다. 유채를 한줌이라도 베고 학교가라는 절박한 어머니의 간청에 밭에 갔다. 급히 낫을 들고 힘을 내어 유채를 힘껏 잡아당기는 순간, 새끼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당황한 어머니는 돌담 아래서 쑥 잎을 뜯어 동여매어주며 비싼 값 치른다고 한숨지었다. 그때 상처가 지금도 선명하게 줄금으로 남아있어 농부의 딸임을 증명하고 있다.
유채 종자는 장마가 오기 전에 털어낸다. 날씨가 후덥지근한 시기다. 유채 줄기를 쌓아놓은 곳에는 별의별 손님들이 찾아든다. 도마뱀이 돌아다니고 애벌레나 달팽이도 단골이다. 지금도 눈에 보인다.
유채를 수확하고 나면 집집마다 수확량이 소문으로 동네에 나돈다. 환금 작물이기에 학교 수업료, 책값 갚기에 바쁘다. 시장에서 맛있는 과일이랑 비싼 돼지고기도 넉넉히 구입한 며칠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는 동안 장마가 찾아온다. 집집마다 구수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유채기름으로 지져낸 지짐과 계란에서 풍기는 냄새는 동네를 진동시키곤 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지 유채 기름은 식용유로 사용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말이 번지며 유채농사는 자연 매력을 잃었다. 다른 농작물인 당근이나 감자, 양파로 바뀌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유채 기름도 서서히 잊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샛노란 유채꽃의 아름다움에 관광객에게 꽤 인기다. 유채 꽃밭은 사진 촬영 장소로 거듭났다. 어린 유채 잎으로 맛있는 요리도 개발되었다.
최근에는 유채 종자를 이용하여 ‘바이오 디젤유’를 개발했다고 한다. 정말 반갑다. 파종법도 기계화 되고 콤바인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재배하고 수확할 계획이란다. 공업용 기름이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혁신적인 일이다. 개발에 박차를 가해서, 친 환경적인 에너지원으로 대체 연료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유채꽃 물결이 출렁이는 제주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세계 자연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위상이 높아진 제주도다.
꿈 많은 소녀시절, 펜팔 친구에게 편지로 소개했던 ‘삼다도 소식’도 떠오른다.
“지금 삼다도엔 유채꽃 물결이 넘실거리고,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물결이 출렁거린다. 봄 향기가 벌 나비를 유혹한다. 나는 제주도의 딸로 태어난 걸 크나큰 행운이라 생각한다.”라고.
이제 나도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섰다. 가난한 유년 시절,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웃 간에 정겨웠던 순간들이 영화 장면처럼 펼쳐진다. 비록 도시에 살고 있지만 농촌 출신 가정주부로서 고향을 그리며 농촌을 사랑하는 생활 개선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한 강연도 빠짐없이 참관한다. 오늘 농촌의 힘든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인정이 넘치고 자연과 어우러진 농촌이 그리워진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벌 나비가 떼 지어 춤을 추는 유채꽃 마을을.
설익은 수박을 보면
이 정 자
우리 동네 입구엔 큰 팽나무가 지금도 있다. 울타리 안엔 구멍 숭숭한 돌담으로 길게 포개놓은 골목을 종종걸음으로 다니던 시절, 바로 우리 앞집에 같은 학년의 토니가 살고 있었다.
사방이 어스름 해져도 밭에 가신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신작로 어귀 담 벽에 기대어 부모님을 기다렸는데, 정수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럼없이 마주 서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어느 날, 정수는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했다. 처마위에 둥지를 튼 어미 제비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면 재잘거리는 노란 입모양이 너무도 재미있다고……. 별일도 아니다 싶어 무심코 제비둥지를 쳐다보며 놀고 있는데 옆 집 정수 친구가 왔다.
그 친구가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서 논다며 소문을 내는 바람에 우린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마주칠 때마다 돌담 한 쪽씩 등에 진 듯 양쪽으로 걷곤 줄달음을 쳤지만 가끔은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어느덧 5학년 여름 방학, 찰흙 공작 숙제가 있었다.
나는 민속자료인 절구를 정성들여 만들고는 그늘진 조심스럽게 말려도 금이 가면서 깨지곤 했다. 답답한 나머지 화해도 할 겸, 정수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문제는 흙에 모래가 많았던 거였다. 마을 오름에 있는 소낭굴 찰흙이라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둘이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찰흙을 구하러 나들이 갔다가 냇가에 들러 멋진 절구를 만들었다. 반나절 이 넘도록 단둘이만 함께 지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니는 할 말이 있는 듯, 돌담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나 있지, 2학기부터는 제주시로 전학 갈 거.”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다시 이별이라니. 그렇게 생이별을 했건만 자꾸만 정수가 보고 싶었다. 제주시에 사는 사람들도 부러웠다.
오년이 지났을까 무더운 여름 날, 정수는 대학생이 되어 방학기간이라며 우리 동네 고모 댁에 왔는데, 아무도 안 계셔서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우리 집에 왔으니 나더러 밥을 달라는 것이었다. 황당하고 당황했지만 반가움에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주었더니 맛있게 먹는다. 객지에서의 생활, 미팅에서 만난 여대생 이야기, 아마존 밀림에 사는 여 전사인 시골 처녀 생각이 나서 더 이상 미팅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활짝 웃었다.
너랑 나랑은 동창이지, 이성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속마음을 감추었다.
동네 초등생 동창들이 정수네 집으로 찾아왔다. 마침 보름달이 뜬 밤이라 마당에서 놀다가 남자들은 수박 서리하러 가자는 모의를 하게 된다. 남자 넷이서 당당하게 어깨를 흔들며 출동했고, 여자들은 설마 하면서 기다리는데 수박을 세 덩이나 따온 것이다. 한사람은 망을 봤다며.
남자들은 근육미를 자랑하며 주먹으로 수박을 내려쳤는데 정수가 따온 수박은 풀 냄새가 물씬 나는 설익은 수박이었다. 수박 고르는 솜씨가 없다는 나의 유별난 핀잔에 대답대신 외국영화 ‘나자리노’의 주제곡을 멋지게 불러주었다. 노래 솜씨에 그만 가슴이 뜨거웠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물질로 청춘을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생모가 사는 부산 영도를 찾아갔다.
출렁이는 고향 바다는 성공해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새 희망을 설계하면서 나름대로는 야무지게 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정수.
해양학과 출신답게 오대양 육대주에 미래를 펼쳐가는 주인공이 되겠노라며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며 다짐하는 정수. 나는 무심한 척 듣기만 했다. 일류대학 출신이기에 마도로스가 되어 외국을 넘나들 정수. 시골 여고 출신인 나. 생각이 많았다. 아마 이런 경우가 있기에 연애 잘 하는 남자들은 나중에 대답해도 좋다고 한 걸까. 묻는 말에 마지못해 대답했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불쑥 화를 내며 항상 누님 같은 말만 한다며 무안을 주고는 상기된 얼굴로 그냥 가버렸다.
또 황당했지만 허공에 미안하다고 독백을 하고 무진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니로 부터 교제하던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가 왔다.
바로 토니 고모님의 아드님이라니. 정수의 외사촌 형이다.
며칠 뒤 언니로부터 용두산 공원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들뜬 가슴을 억누르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내 마음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캔 맥주를 따라 마시고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언니 네와 우리 따로 산책을 하였다. 정수도 심각했다. 그 멋진 노래라도 들었으면..., 침묵이 무척 흐른 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너 네 형님과 우리 언니가 결혼한다며. 결혼이라는 대목이 얼굴을 달구는 것 같아 비둘기가 구구대는 곳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렇게 언니 결혼식장에서 만난 정수에게 “어마, 사돈님.” 하며 과잉 친절을 베풀었더니 정수도 쑥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애써 웃으며 손을 내밀고는, “그래, 우린 동창이며 나의 영원한 누님.”
가끔 화장대 앞에 있으면 설익은 수박이 생각난다. 그때 설익은 수박 대신 잘 익은 참외를 따주겠다고 남몰래 불렀다면 어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