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베트남 며느리/조윤수

샛년 2010. 2. 16. 22:48

베트남 며느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조윤수

                             

 

 

   정형외과는 치열한 삶의 전장에 차려진 야전병원이다. 병동에는 장군들이 많다. 우리 병실에도 갑옷 입은 장군 환자가 한 명, 허리 갑옷만 입은 사람, 목에 투구를 입은 사람이 있다. 다를 고참이다. 관록에 따라 움직임이 달랐다. 병실 생활에서 알아야 할 사항들을 자주 알려주었다. 장군 갑옷은 척추 수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슴과 등의 보호대를 입고 있어야 한다. 허리디스크 수술환자는 허리를 감싸는 보호대를 해야 하고, 목디스크는 목 갑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나는 발을 움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 2주 동안 발바닥부터 종아리까지 반 깁스를 하고 있었다. 허리 갑옷과 목 갑옷을 입은 사람은 허리를 굽힐 수 없고 또 목을 돌릴 수 없으나 말은 잘도 한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 나는 소설을 읽는 것 같다. 허리를 굽힐 수도 없고 목을 돌릴 수도 없으나 걸어 다니기는 잘 하니 나의  밥상을 나르는 일은 그들 몫이었다. 너무나 벼슬 자랑을 많이 해서 이담에 밖에 나가서는 그런 벼슬 자랑을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장군복을 입은 사람이 자칭 방장 노릇을 하였다. 그 사람은 집에서도 입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군것질을 달고 산다고 했다. 그러니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깨어 있을 때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이는 장수 산골에서 몹시도 험하게 몸을 쓴 것 같았다. 몇 년 전에는 무릎 수술까지 받았는데 이번에는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꾸부리지 못하니까 며느리가 붙어살며 병간호를 도맡아 하느라 병실에서 같이 생활했다. 알고 보니 그 며느님이 베트남 며느리였다. 베트남 며느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을 만큼 우리말을 할 수 있었다. 통통한 몸매에다 복스러운 얼굴이고 상냥했다. 무엇보다 마음씨가 고운 것 같았다. 저녁때마다 세수대야에 물을 떠와서 구부리지 못하는 시어머님 발을 정성스럽게 씻겨드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베트남에서도 그렇게 어른을 섬기지 않았을까 싶었다. 사람은 본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며느리가 있는 동안에 나도 덕울 많이 봤다. 장군 시어머님이 며느리에게 내 시중을 들어주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먹을 것도 자주 챙겨주었다. 그리고 퇴원하면 은혜를 꼭 갚아야겠다고 해서 주소를 물었다. 그러자 누워 있던 장군 시어머님이 '하지 마!'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앗차, 실수했구나' 하고 빨리 알아차렸다. 그리고 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가정에 대한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TV 에 '러브 인 아시아 Love in Asia'란 프로그램도 생겨서 아시안 며느리의 성공담을 소개하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있다. 2009년 6월에 전북도청에서 '전라북도 다문화가족자녀 보육실태 및 지원방향'에 대한 전북여성정책포럼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 중에 하나가 또한 '다문화가정'에 대한 것이었다. 2008년 7월 현재 우리나라 결혼이민자 수는 144,385명이며 그들의 자녀는 58,007명에 달한다. 국민 총 결혼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4.8%에서 2008년 11.1%로 불과 7년 사이 3배정도 증가했다. 그에 따라서 자녀양육 문제가 다양한 모양으로 일어나고 있다. 아동을 돌볼 사람이 없는 집, 아동 건강관리의 어려움, 부모 중 한 쪽이 외국인이어서 의사소통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 집단따돌림 등에 대한 적절한 보살핌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어떻게든 국가적 도움을 받아내기 위한 위장 전술을 쓰는 가족들로 인하여 복잡한 민원이 발생하고 있다. 한 쪽으로는 노력하여 성공하는 편이고, 또 다른 쪽에서는 병들고 있는 경우도 많다. 2020년에는 20대 한국인 5명 중 1명이 다문화가정 자녀가 될 것이고, 신생아 중 3분의 1이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추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과거 6.25 전쟁으로 인한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20대 때 외국 원조를 받아오는 천주교 기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펄벅재단의 카운슬러 일을 파트 타임제로 재택근무를 하였었다. 3개월에 한 번식 혼혈아 가정을 방문하여 상담하고 그들의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써주고 답장을 받고 하는 일을 했다. 모두들 미군부대 주변의 혼혈아(아이노꾸)들이었다. 그때는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기였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한창 많았던 때였다. 그로부터 우리나라는 30여 년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오는 아시안들의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민족이 되고 있다.

  입원 첫날 2인실에서 나는 40대 젊은 여자와 그의 남편과 셋이서 동침했다. 그녀가 다문화가정일을 했는데 아시안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아시안 며느리를 둔 가정에서는 그렇게 전화를 걸어와서 다른 곳으로 빼어 가는 예가 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실제로 많은 돈을 들여서 아시안 며느리를 구했는데, 나중에 도망가서 경제적 손실만 많이 보게 된 예가 가끔 있다고 했다.
   짧은 병실 생활에서 이렇게 다문화가정에 대한 일을 했던 사람도 만나고, 베트남 며느리를 만나니 아시안이 나의 이웃으로 다가온 것을 실감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과 더불어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식도 함께 가져야 할 때인 것 같다. 베트남 며느리 남편은 40대가 넘도록 방탕하다가 이제 겨우 마음을 잡았다고 했다. 나는 한국말도 열심히 배우고 베트남 말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해주었을 뿐이다. 가족들은 아시안 며느리들이 많이 배우고 정신이 깨어나면 주변의 유혹을 받을까 걱정이다. 언제까지 집안에서 갇힌 생활만 할 것인가. 베트남 며느리가 제대로 한국을 배우고 바른 정신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 그리하여 사랑과 함께 믿음으로 결속하여 당당한 대한미국의 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란다.

                                                                                                                                   (2010/2/5)

 

출처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글쓴이 : 김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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