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수필] 저 바다의 은물결처럼 - 오 승 휴

샛년 2010. 6. 5. 00:08

                  저 바다의 은물결처럼

 

                                                                                                                                                 오  승  휴

  아름다운 섬이 어깨를 우쭐대게 한다. 그 속의 산과 들이 그렇고 올레길이 그러하다. 푸른 바다가 품어 안고 있어 나그네가 눈독을 들이는 곳이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받는 섬이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늘 꿈과 낭만을 안겨주는 제주. 요즘 분위기를 타며 대자연의 보고(寶庫)로 각광받고 있다.

  화창한 어느 날, 한 노인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 노인의 아름다운 기부(寄附)가 시중의 화젯거리다. 자기가 소유한 목장부지인 임야 사만육천여 평을 고향의 대학발전기금으로 쾌척해 모두의 마음을 출렁이게 하고 있다. 아니, 그게 시가(時價)로 삼백여억 원이나 되는 땅이라니!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기부하게 된 동기(動機)다. 자연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다. 동기 자체가 놀라움을 넘어 자못 엄숙하기까지 하다. 마음속에 닫혔던 문을 활짝 열게 한 뭔가 분명히 있다. 소중한 목장을 기부할 만큼 ‘자연에 감사’하는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자연은 보물창고와 같다. 혼자 독점할 게 아니다. 은혜로운 자연의 혜택에 감사한다. 고통 받는 많은 환자들이 이 보고(寶庫)를 이용할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임을 확신했다. 이 목장부지에 우리나라 최고의 노인병원과 요양시설을 제주대학에서 건립해주길 바란다.”

  그분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토록 호감 있고 의연하게 기부 동기와 바람을 밝혀 존경스러웠다.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8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마음이 사랑으로 젊어지면 몸도 건강하게 되나 보다. 목장을 인수한 지는 삼십 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 후 줄곧 그 목장에서 살아왔다. 가축을 사육하면서 잡목과 가시덩굴을 정리하고 산림을 보호하며 관리해온 노인. 팍팍한 삶에서 조그마한 기부도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그 선행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목장 주인인 그분은 제주시 오등동 출신인 K노인이다. 고향에서 고교를 졸업 후 광주에서 대학을 나왔다. 그곳에서 동물병원장과 축협조합장, 지역 수의사회장도 역임한 분이다. 지금도 그곳 광주에 살고 있다. 고향을 잊지 못해 자신이 나고 뛰놀던 한라산 자락의 고향마을 인근에 있는 목장을 구입했다. 거기서 사슴과 소를 키우며 관리한 지 수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애지중지 가꿔오며 애틋한 온갖 정성이 깃든 목장이 아닌가. 자신의 전 재산이다시피 한 그 목장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한라산 속 목장은 공해가 거의 없는 곳이다. 수의사인 그분은 거기서 가축을 관리하는 인부들과 함께 자연에 묻혀 생활했다. 본인 자신은 물론 인부들 중에 질환을 갖고 있던 분들이 현저하게 건강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폐결핵이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에 목장의 치유 능력이 크다는 걸 직접 확인한 거였다. 자연 치유였다. 한라산의 맑은 물과 청정한 공기의 조화가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치유하고 있음에 놀랐다. 자연에 감사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밑바닥으로 끌어당겨주던 중력(重力)조차 감사한 순간이었다.”

  어느 우주인의 체험담 한토막이다. 지구로 살아서 귀환한 순간의 그 고백이 절절하다. 숨 쉬는 공기와 마실 물, 그리고 편안히 일하고 쉬는 장소를 내주는 게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것만도 감사할 일인데 인간의 병까지 치유해 주고 있다. 자연은 우리의 요람이요, 일터요, 생명의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러하나 그 고마움을 다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다. 잊기 십상이다. 

  K노인은 만성질환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다. 수의사로서 남에게 말 못할 일도 많았을 거다. 가축의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분이지 않은가. 목장에서 자신의 질병을 자연치유 받았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랴.

  생명을 살리는 일은 사랑이 없으면, 생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희생과 봉사정신은 필수다. 그분은 자연의 치유를 받고나서 그 사랑에 엄청 감동 받았음에 틀림없다. 병들어 고생하는 자를 위해 보물을 흔쾌히 내놓을 만큼.

  살아가노라면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예기치 않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닥친다. 비록 곧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도 참고 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괴로움을 겪고 나면 성숙해지고 삶에 감사하게 된다. 인생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한데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는 똑 같게 마련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어떤 삶을 살다 갈 것인가, 즉 생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다.

  그 노인은 꿈과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채우고 있다. 그 빛이 찬란하고 그 냄새가 향기롭다. 고향바다에 출렁이는 은빛물결처럼 그분의 선행이 눈부시다.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은 의녀(義女) 김만덕의 덕행을 찬양해 *‘은광연세(恩光衍世)’라고 글로 남겼다. 훗날 추사선생 같은 누군가가 제주에 온다면 오늘의 이 일을 뭐라 할까.

  계절이 바뀌는 길목이다. 바닷물 위로 반짝이는 햇살이 곱다. 걸터앉은 바위를 바람이 부드럽게 넘고 있다. 갯냄새가 상큼하다. 스스럼없이 우리가 받는 자연의 선물이다.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소리가 까~악 철썩 가슴을 울린다.

   어느 한분이 지금 내게 묻고 있다.

  “자네, 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랑과 감사로 가슴은 뜨겁게 불타고 있는가.”

                                                                                                                            2010. 5. 28

                                                    

 

 

*은광연세(恩光衍世) : 제주에 유배되어 온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조선시대에 자기의 전 재산을 내놓아 굶주린 제주 백성을 구한 의녀 김만덕(1739~1812)을 기려 쓴 친필 휘호다.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는 뜻. 추사가 김만덕의 덕행을 찬양해 그 가문의 3대손인 김종주에게 써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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