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방 갈 고모님 마음
외방 갈 고모님 마음
(고모님 마음)
요즘 제주에는 이사철이다.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나 예로부터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구관은 하늘나라에 가고 신관은 오지 않는 신구간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까지) 이라는 풍습이 있다. 대부분 이때 이사한다. 한꺼번에 이사하다보니 북새통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쓰다가 버린 물건들이 클린하우스 용기는 넘쳐나다 못해 산더미를 이룬다.
매년 이맘때면 집 없는 것도 서러운데 한파마저 가세한다. 신구간이 2일 남은 오늘도 눈발이 날리는 오후 집을 나섰다. 길섶에 돌아서는데 내 시선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헌옷수거함 용기가 넘쳐나서 땅바닥에도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모아 수거함에 밀어 넣고는 문득 추억의 얼굴이 떠오른다. 잔정이 많은 고모님 얼굴이다. 헌옷과 고모님, 지난날 가난이 만들어준 기억 꺼내어 때론 추억여행을 떠나보곤 한다.
고모는 해녀 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에서 잠역질하는 것은 고통이지만 가난이 생활을 붙잡고 있는 시절에는 삶은 곧 고난이었다. 고모는 가난의 시련을 이겨 내려고 일본행 출가 해녀를 택했다. 타국에서 역경이 부닥칠수록 이를 악물고 돈을 모으고 친정에도 돈을 부쳐와 할아버지는 신작로 옆에 밭을 사놓고 고모자랑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억순이 고모가 고향에 오는 날이었다. 고모가 이번에는 무엇을 가지고 올 것인가 하는 마음에 수업도 대충 끝내고 달려와 보니 마당 멍석위에 고모가 가지 온 옷 보따리가 펼쳐져 있었다. 엉겁결에 내가 갖고 싶은 몇 가지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는 야단치듯 나무라며 “너만 가지면 어떡해 ”옷을 뺏으려하지만 나는 끝내 놓지 않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눈물 덕에 고모가 “어서 네가 가져 ”허락해주신 일들이 어제 같다.
일본에서는 헌옷이지만 내게는 비단 옷이었다. 옷을 입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생각으로 머리맡에 놓고 잠을 설쳤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촉촉한 미소가 번져 난다.
고모님이 가져 온 것은 옷만이 아니었다. 라디오며 전자제품은 우리 집이 처음 이니 고모가 올 때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고모님이 가져온 옷은 집에서 입던 옷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이웃에서 입던 옷을 모아 깨끗이 세탁을 하고는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귀국길에 가지 온 것 들이다. 지금도 고모님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가설 때가 있다. “일본에서는 먼지 말고는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버리지 않는다.”그 말씀 겨울바람 귀 씻은 목소리로 다가서는 때면 버리려던 마음도 그만 움츠려 들고 만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난을 잊어버릴 만치 이렇게 잘살았을까. 의문의 언저리엔, 언제나 글쎄 라는 의문과 느낌이 교차(?!)하는 것은 비단 나만이 상념이 아일 듯싶다.
가난을 멍에처럼 살아온 어머니와 고모님 세대는 궁핍은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참아온 세월이었다. 하지만 가난도 즐거움으로 살았던 어린 시절을 생각날 때면 고모님의 인정미가 더 짙게 다가선다. 아마도 가난 속에 인정미야 말로 목마름을 추겨주는 감로수(甘露水)보다 더 달콤함이 맛이 배어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나는 여기저기 두었던 헌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모았다. 해외 난민을 위해 보내지는 클린하우스 수거함에 넣기 위해서이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야윈 정성이고 배려이다. 하지만 남을 위하는 아주 작은 불꽃이라는데 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버스타고 배타고 무거운 옷 보따리 들고 현해탄 건너오신 고모님 그 정성에 비기면 아무것 같지 않는 마음이다. 하지만 말로 글로 다 표현 못한 아쉬움을 내 헌옷을 통해 고모님 마음을 다시 한 번 만나보는 것이다.
“ 고모님, 고모님이 저에게 주신 마음 조금 덜어내어 삶의 빛을 찾아 외방(外邦) 나들이 보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