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묵
메밀꽃 같은 하얀 눈이 사뿐사뿐 춤춘다.
가까이 보이는 한라산 설국 자태에 눈이 부시다. 은빛으로 반사하는 능선에 나타난 한라영산 영실 계곡에, 고드름 창칼을 높이 쳐들고 오백장군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걸까?
능선 따라 반사되는 계곡의 늪에서, 이마위에 훈장 띠를 동여맨 설문대할망의 방그레 웃는 얼굴모습 속에 그리운 할머님의 얼굴이 겹쳐진다.
동장군이 위용을 부리는 동짓달 그믐날에 할머님은 하얀 소복을 입으시고 승천 하셨다. 벌써 돌아가신지 15년~ 기일 제사가 다가온다.
할머님은 반농반어 하는 집 외동아들에게 시집와서 2남5여를 키우셨다.
상군 해녀는 언제나 종종 걸음으로 동네를 휘휘 돌아다녔다. 여장부의 가슴속에는 먼저 저승에 가버린 두 며느리와 두 딸이 있었다. 어려운 시국을 원망하며 마음속은 언제나 불덩이가 웅크리고 들어앉았는지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시할머님과의 인연은 같은 마을, 친정동네 우물(통) 물을 길어다 먹은 이웃이다.
내가 한 발 두발 걸을 때부터, 요염한 처녀가 될 때 까지 할머님은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군 제대를 앞 둔 손자에게 창고항아리에 고깃고깃 모아두었던 거금을 꺼내주면서, 맞선을 주선 시켰다고 한다. 나는 할머님의 장손 며느리이다.
1948년부터~1954년 제주에서 발생한 4.3사건은 무력 충돌과 집단 학살의 사건이다. 피 비린내 나는 아비규환의 강탈 현장에서 여장부의 능력은 대단했다. 당시18살 작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름 둔덕에 토굴을 만들고 메밀을 경작하면서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마을 집들도 몇 채인가 불타 없어지는 참혹한 4.3항쟁 속에서도 불빛을 감추고 제사를 숨어 지냈다. 제사 지내고 나면 폭도들이 달려들어 음식과 제기를 모두 빼앗아 갔단다.
외양간에 마 소. 돼지우리(통시)에 새끼 밴 어미 돼지도 끌고 가는 무차 별 잔혹함에 눈에서는 피 눈물이 흘렀다. 할머님의 큰 며느리는 19살 나이에 시집을 왔다. 잔치 다음날 폭도들이 산으로 끌고 가서 영영 이별을 했다. 어렵고 무서운 상황에서도 조상기일 날에는 농사지은 메밀을 창고 항아리에서 꺼냈다. 멍석을 깔고 맷돌에 애환을 섞어가며 가루를 내고 가는 체로 털어냈다. 고운 가루로는 메밀묵을 쑤었다. 그리고 성긴 가루로는 메밀 만두떡 만들어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할머님의 하소연에 의하면, 어느 제사 날 인가에 학교 다녀온 손자 녀석은 할머니에게 “오늘 제사 하니까 만두 떡 하나만 주세요.” 했지마는 줄 수가 없었단다.
야속한 세상에 한 숨으로 살았다는 할머니 말에 의하면 메밀 곡식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단다. 메밀쌀로 끓인 죽은 입 맛없는 환자의 원기회복에 좋았다.
곡류인 메밀은 동부 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 된다고 하는데, 종류에는 조파 말파가 있다. 메밀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알곡물이다.
메밀 채(껍질)를 이용한 베게는 머리를 시원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개를 바르게 받쳐주기 때문에 숙면을 취하는데 효용이 있다고 한다. 또한 유아용 베게로 사용하면 뒤통수가 예쁜 머리통으로 된다.
요즘 메밀가루는 웰빙 음식 만드는 재료로 일등이다. 지방을 분해 한다는 메밀 차의 효능은 압권이다. 꿩 요리 중 특히 꿩 칼국수는 보양 탕이다. 제주도의 향토 음식 대표도 빙떡이 아닌가? 돼지고기 뼈 푹 삶은 국물에 몸을 넣고 푹 끓이다 메밀가루를 풀어 넣으면 입에 달라붙는 몸 국이 된다.
산후 조리 음식으로 만드는 메밀수제비는 친정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겨진 음식이다. 소고기를 넣고 푹푹 끓이다 미역을 넣고, 메밀가루 반죽을 수저로 떠 놓으면 군침이 나오면서 아기에게 영양 만점의 모유가 좔좔 나온다. 해산 할 때마다 친정어머니는 메밀가루를 미리 장만해 두셨다.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를 감싸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벌써 큰 양푼 가득 수제비를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혈액 순환이 잘 되어서 화사한 얼굴색은 친정 엄마 표 수제비 덕분이라 생각한다. 특히 여성들 생리 불순에 효험이 있다한다.
할머님이 살아 계시던 어느 해 할아버지의 제사 날.
할머님과 제사상 음식을 만들었다. 메밀묵은 노련한 솜씨가 발휘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할머님은 급한 볼일이 생겨서 나더러 메밀묵 쑤고 있으라며 급히 외출을 하셨다. 눈여겨봤던 묵 쑤는 일이건만 완전히 죽처럼 얇았다.
속상해하는 나를 보고 할머님께서는 “아가야 걱정 하지 마라” 익은 음식이든 선 음식이든 목구멍 통해서 들어가면 마찬가지라며 안심 시켜주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할머님 모습만보면 마음이 든든했다.
절약 정신이 남보다 뛰어난 할머님은 언제나 지혜로움이 솟아나서 창고에는 항아리 식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부리가 따진 항아리에는 각종 곡물 씨를 보관하였고, 큰 물 항아리가 따다지면 듬직한 오줌항아리로 변소 가는 모퉁이에 뚜껑을 덮고 있었는데 천연액체 비료를 만들고 마늘밭에 뿌려주었다.
할머님의 우영 밭에는 여러 가지의 채소들이 사철 푸르렀다.
오늘 재래시장에서 제사 음식 차릴 재료들을 구입해 오면서, 메밀가루도 구입했다. 할머님 기일에는 정성들여 메밀묵을 쑤어서 단단히 굳으면 직사각모양으로 곱게 만들어 적 고지에 꿰어 참기름을 바르고 제사상에 올려놓으리라.
우리 집안의 편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신 할머님!
손자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모습들을 지켜보시며, 돈으로 사람을 산다면 나는 하나도 살수가 없다. 많은 보물을 소유한 나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포근하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자손들을 바라보시던 새하얀 머리의 할머님!
할머님의 넉넉한 마음과 손길이 그리운 날이다.
2010년 1월11일 샌님 제출~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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