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씨녀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절부암
한경면 용수리 포구에는 절부암이라 부르는 바위언덕이 있다. 이 언덕에는 아열대 상록수가 빽빽이 들어 서 있는데 애절한 사연 하나가 전해 내려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옛날 이 마을에 강씨와 그의 아내 고씨가 살았다. 강씨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혼자 가난하게 살다가 같은 마을의 고씨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내 고씨도 역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살아오다가 강씨와 혼인을 하였다. 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며 금실이 아주 놓았다.
강씨는 용수리 앞 바다에 있는 차귀섬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대바구니를 만들어 팔아 생활을 꾸려 나갔다. 차귀섬은 죽도(竹島)라고 불릴 만큼 좋은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그 날도 강씨는 배를 타고 차귀섬으로 대나무를 베러 갔다. 대나무를 베면서 노래를 부르자 그 노래 소리가 차귀섬 가득히 울려 퍼졌다. 대나무를 어느 정도 벤 후 그는 아내가 싸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라야 대나무 그릇에 담은 꽁보리밥과 마늘장아찌 몇 개가 전부였지만 맛있게 먹어치웠다.
강씨는 다시 대나무를 베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아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바구닐 많이 만들어야지. 한림장에도 내다 팔고, 대정장에도 내다 팔고, 멀리 제주장에도 내다 팔아야지. 그리고 이번 장에 가서는 예쁜 비녀를 사 아내에게 선물해야지. 돈을 많이 모아 집도 사고 밭도 사야지.' 강씨는 미래에 대한 설계로 고된 줄도 몰랐다.
대나무를 배에 가득 싣고 돌아 올 때였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왔다. 용수리와 차귀섬 사이는 바다가 좁아지는 해협으로 물살이 특히 세고 소용돌이 치는 곳도 있다. 강씨의 작은 배는 거센 파도에 뒤집어지고 강씨는 온힘을 다해 헤엄을 쳤으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말았다. 얼마 후 돌풍은 멎었다. 언제 돌풍이 있었느냐는 듯 바다는 맑고 잔잔하였다.
밭일을 나갔던 아내 고씨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 왔는데 너무나 집안이 조용하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대바구니를 짜던 남편이 일을 멈추고 나와서 다정하게 얘기를 건네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하였는데 이 날 따라 남편의 인기척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에 바람을 쐬러 갔나?' 고씨는 이렇게 생각하며 저녁밥을 짓기 시작했다.
남편은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 고씨가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남편의 행방을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다만 몇몇 어부로부터 낮에 바다에 심한 돌풍이 불어 하마터면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고씨는 이튿날 본격적으로 남편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둘러보자 몇 개의 나뭇조각이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다. 부셔진 배의 조각이 분명하였다. 그 주위로 남편이 차귀섬에서 베어온 것으로 보이는 대나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남편은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고씨는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여나 남편이 차귀섬으로 헤엄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을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배에 다 싣지 못한 대나무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었다.
시체를 찾아야 장례라도 치를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씨는 남편의 시체를 찾기 위해 용수리 바닷가는 물론 그 인근 해역 구석구석을 다 뒤졌지만 남편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고씨는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체가 떠오르기를 하늘에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석 달 동안 고씨가 남편의 시체를 찾기 위하여 닳아 없앤 짚신만도 열 켤레가 넘었다. 고씨는 이제 거의 미친 사람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용수리 사람들이 아침에 포구로 나와보니 바위언덕 위 커다란 팽나무 가지에 소복을 한 여인이 매달려 있었다. 강씨의 아내 고씨가 목을 매단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 때 누군가 외쳤다.
"나무 아래쪽에 시체가 있다!"
나무 아래쪽은 깊은 바다였다. 몇몇 장정이 내려가 시체를 건졌다. 석 달을 찾아도 찾지 못했던 강씨의 시신이 아닌가.
"고씨의 정성이 하도 갸륵해 남편 강씨의 몸이 떠오른 거야."
"그래, 정말 그래. 둘은 떨어져선 살 수 없었던가봐."
마을 아낙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마을 사람들은 이 두 시체를 거두어다가 당오름 양지 바른 곳에 합장해 주었다. 이 신기한 이야기가 대정 고을 전체에 쫙 퍼졌다.
이 무렵 대정 고을에 신재우란 사람이 있었는데 강씨 부부의 소문을 듣고 만약 자기가 과거에 급제한다면 열녀비를 세워 주겠노라며 여러 사람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신재우는 과거에 낙방하고 말았다. 실망한 그는 낙향하여 빈둥빈둥 놀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꿈에 강씨와 그 아내 고씨가 나타나 신재우에게 한번 더 과거를 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꿈을 깬 신재우는 이전에 자기가 과거에 급제하면 열녀비를 세워주겠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이는 필시 강씨와 고씨의 혼인 자기를 일깨워주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게으른 생활을 접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신재우는 다시 과거를 보아 합격하여 대정현감으로 발령 받았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합격한 것은 강씨 부부의 보살핌 때문이라 생각하고 현감으로 부임하는 즉시 조정에 상소하여 고씨의 열녀비를 세워주도록 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돈 백 냥을 내주며 해마다 3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고씨가 목매달아 죽은 바위언덕은 그 후 사람들에 의해 절부암이라 불려졌다.
출전: 神들의 섬 - 제주의 신화와 전설 - 2001 제주세계섬문화축제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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