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7월 141호 채장희 / 아버지의 체취

샛년 2013. 7. 16. 23:00

 

경북대학교 대학원 졸업(농학박사). 대구수필창작대학 수료.

대구 수필사랑문학회 회원. 현재 경북농업기술원 원장.

 

아버지의 체취 / 채장희

 

 

새해 첫날, 햇살이 비쳐온다. 지난해 마지막날인 어제의 아침 해와 다를 것이 없는데도 새해라는 이유로 다른 느낌이고 설레기까지 한다. 지금쯤이면 동해나 산 정상에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저마다 소원을 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첫 햇살을 병실에서 맞았다. 대장암 수술을 하신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서다. 불행하게도 간으로 전이되어 간도 삼분의 일을 잘라내는 바람에 일흔여덟의 연세와 맞물려 회복이 많이 늦어지고 있다.

 

문중 일이며 향교 행사 등으로 연말연시를 바쁜 걸음으로 보내셔야 할 텐데 병실 한쪽 반 평짜리 침대에 누워 코에 긴 줄을 꽂고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부모님의 병환고생은 자식의 업보라는데 내가 잘못 모셔서 새해를 병실에서 맞게 해드린 것 같아 죄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입원해서 스무날 동안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아버지를 제대로 느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살갑게 대해 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가까이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런 아버지를 이제 병실에서나마 다리도 주물러드리고 손도 아우르고 이마도 만져보면서 체취를 맡을 수 있었으니 그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나마 지우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사실 아버지의 삶도 기구했다. 결혼하여 3년 만에 핏덩어리 하나 남기고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하여 딸 하나 아들 셋을 보았는데 셋째 아들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막내아들은 군 복무 중에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며 가슴에 묻었다. 그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이며 사셨으니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이불 밖으로 나온 손등의 깊은 주름과 굵은 힘줄이 고달팠던 삶을 대신하는 듯했다. 가만히 만져본다. 얇고 여리다. 객지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모시지 못해 죄스러우니 빨리 건강을 되찾아 제대로 된 효도 한번 받아보시라고 중얼거린다.

 

아버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천천히 뜨면서 추운데 뭣 하러 일찍 왔냐며 일어나 앉으신다. 창밖을 보시라며 커튼을 걷었더니 빌딩 사이로 비치는 새해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딱히 나눌 이야깃거리도 없다. 그동안 궁금했지만 마음바닥에 묻어둔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쯤 외할머니께서 보여준 어머니 사진 중에서 한 장을 늘 부적처럼 갖고 다녔다. 주머니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드리면서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시냐고 여쭈었다. 금방 눈빛이 달라지며 무척 예뻤고 예의바르고 노래도 잘했다며 얼굴이 상기된다. 일찍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면 너나 나나 고생을 덜했을 텐데 매정한 사람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아버지 얼굴에 뭔지 모를 쓸쓸함이 어린다.

 

아버지는 내게 맡겼던 손을 빼고는 내 손을 이리저리 보면서 손이 예쁘고 참한 것이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내 손은 아버지 손과는 닮은 곳이 없었다.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저는 아직도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꿈속이라도 한번 나타지 않으니 아버지 말씀대로 매정한 것 같다고 넋두리를 하였다. 또 아버지는 내게 늘 너무 엄하셔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며 동생들하고 차별하는 줄 알았다는 속내도 털어놨다. 도 단위 기관장에 취임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답은 내 스스로 내려져 있었다. 늘 가슴 한쪽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덩어리 하나를 안고 때로는 일찍 돌아가신 것을 원망도 하곤 했지만 그럴수록 덩어리의 무게는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읽었던 책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면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라.”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나는 그리움을 잊기 위해 자신을 무서우리만큼 몰아쳤다. 시간을 정하면 반드시 지켰고 없던 일도 만들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생활화되었고 공직생활에서는 빈틈없고 성실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35년 객지에 근무하면서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바탕은 어릴 때부터 나를 강하게 만든 훈련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지無知가 탄로날까봐 시간을 쪼개어 공부했고, 빈틈이 보이면 비집고 들어올까봐 자기계율에 엄격했던 것이 어미 일찍 죽었다고 가여워하지 않고 말없이 바라보시기만 했던 아버지의 큰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 첫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니 난생처음 엄마란 단어를 쓰며 아버지께 투정을 부려봤다. 환자만 아니면 아버지의 무릎이라도 베고 누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리가 아프시다며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다. 아버지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있었다. 아마 어머니 냄새와 섞여 있는 냄새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해는 창틀을 훌쩍 지나 중천으로 가고 있었다.

 

출처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글쓴이 : 노혜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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