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영 / 편지
여고를 마치고 시골집에 묻혀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뜻에 꿈을 접은 나는 친구들이 보내주는 글만이 희망이었다. 그날도 친구의 편지를 기다리면서 대문 앞에 나가니 뜻밖에 항공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봉투에는 낯선 남자의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시골에 묻힌 나를 어떻게 알고 편지를 보냈을까? 궁금하면서 손이 떨렸다. ‘여기는 낯설고 물 선 이국땅 일본입니다.’ 로 시작된 편지는 서두부터 심상치 않았다. 달필에 한자가 반이나 섞여 있어서 가슴이 설레었다. 친척 조카의 졸업앨범을 보다가 두 갈레로 묶은 머리가 청순해 보여서 편지를 보내노라고 했다. 제철회사에 근무하는데 일본연수중이라 해서 건실한 청년일 것 같았다.그땐 하찮은 편지들이 흔하게 날아왔기에 읽지도 않고 아궁이 속으로 던져졌지만 그 편지만은 왠지 태우기가 아까웠다. 글벗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구절에 이미 내 마음은 눈 쌓인 대나무 가지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주고받는 편지가 아버지께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며칠을 망설였다.
하지만 얌전한 척 억눌려있던 나는 기어코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답신을 보내고 말았다. 첫 글이니만큼 예의를 갖춘 인사정도의 글을 일본으로 보냈더니 숨 가쁘게 답장이 날아왔다. 그 때부터 배달부의 발길은 바빠졌고 우표료도 만만치 않았다.
싸락눈이 울섶을 다독이는 겨울이 되자 그의 글은 외로움을 듬뿍 싣고 날아들었다. 플라타너스 잎이 포도 위를 뒹구는 것을 보니 고독이 엄습해 온다는 사연에 나 또한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그리움은 깊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감성의 골이 깊어지다가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아버지는 봉건사상이 뿌리 깊게 내린 분이다. 칠십년도 초에 조선시대 말기의 생활풍습을 답습하고 있었다. 딸자식은 가사일과 예의범절을 익혀 출가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머리는 길러서 묶어야했고 옷은 긴 치마만이 허용되었다. 과년한 딸아이가 종아리를 드러내는 짧은 치마와 엉덩이 선이 드러나는 바지 입는 꼴은 용납을 못하셨다. 나의 행동반경은 집안대소가와 냇가 빨래터였고, 하는 일은 가족을 위한 밥상준비와 집에 찾아오시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일이었다. 집안제사가 들면 제수음식을 도우러 다녔으며 빨래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림질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조신하게 딸을 가르친다고 자부하셨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어느 청년과 밀담을 주고받으며 연서가 익어가고 있었다.
출입이 많으신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배달부가 마주칠 확률은 다분히 많았다. 길에서 한집 식구를 보면 무조건 우편물을 전해주기에 그런 불운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편지는 어느 날 아버지의 손에 전해지고 말았다. 상문을 다녀오신 선친의 안색이 평소와 달랐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예리한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하늘을 날아오던 편지가 아버지의 손에 잡혔구나 싶었다.
사랑방으로 불려가니 이미 방안은 우울한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법관 앞에 선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앉자 우렁찬 고성이 분출할 것 같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어머니는 사랑채의 일꾼들이 딸의 행실을 알면 망신살이 뻗친다며 제발 큰 소리는 내지마시라고 당부를 했다. 연거푸 피우던 담뱃불을 끄더니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놓으시는 게 아닌가. 상상외로 너무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기 무슨 편지고?”
너무나 놀라운 이변이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버지를 보며 얼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석고대죄라도 할 자세였던 내 어깨가 한결 가벼웠다. 마음속으로 남자를 고르는 내 안목이 이만하면 수준급이지. 우쭐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꽉 다문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니 공연히 지레 겁을 먹었구나 싶었다. 꽃편지가 전하는 진솔한 마음과 유려한 문체가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이라며 안도하기도 했다. 사태가 다분히 희망적이어서 내용을 슬쩍 훑어보았더니 귀국하게 되었으니 첫 만남을 약속하자는 내용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글을 보니 사람은 괜찮아 보인다. 내가 먼저 만나봐야겠다.”
마치 당신을 만나자는 듯이 당당하게 선포하셨다. 모든 일을 뜻대로 하시는 아버지는 나를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풀어 둘리 없었다. 그 때는 전화가 없었기에 나대신 아버지가 나간다고 알릴 수도 없었다. 은밀한 만남을 기대하던 청년은 근엄하고 고집스런 어른이 나타나 취조 하듯 면접을 봤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침부터 중절모를 쓰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그 청년을 만나려고 서두르는 아버지를 보며 내 마음은 술단지처럼 바글거리며 안달을 했다. 당혹스러울 장면을 생각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편지하나 제대로 간수 못한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지……. 미안하기도 했다.
어둑한 밤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술집에서 입맛 쓴 술잔을 기울이는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겨울마당에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촌각을 곤두세우며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기다렸다. 시계바늘이 자정에 이르자 드디어 술기운이 거나하신 당신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다소곳이 지켜보니 실오라기 같은 희망은 산산조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목숨을 끊을 만큼 절절하다면 보내 주겠다. 대신 나는 그때부터 두문불출한다.”
나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질식할 것 같았다. 상황을 모르는 그분은 여러 장의 글을 다시 보내왔으나 단호한 아버지의 엄포 때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그가 중매인을 거듭 보내왔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일면식도 없는 그 사람 생각은 갈수록 진한 그리움으로 피어올랐다. 배달부의 그림자만 봐도 헛물을 켜고 기다렸다. 그 옛날 서라벌의 영지에서 무영탑 그림자를 기다리던 슬픔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이제 훌쩍 세월이 흘러 아픔도 미련도 사라졌다. 우로와 풍상에 생긴 진물이 마르지 않을 때마다 성큼성큼 그가 다가오더니 요즘은 그 잔상마저 희미하다. 그토록 매정하게 막아서던 선친도 저승으로 가셨는데 한번쯤 마주앉아 옛일을 사죄하고 싶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미 갈 길은 다르지만 젊은 날 가슴 떨리는 추억마저 없었다면 외로운 석양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가끔은 궁금하다. 그는 지금 어느 하늘아래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울주 융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재 양산에서 살고 있다.
2004년 《문학예술》에 《노을처럼 살고 싶다 》등단,
2005년 《수필과 비평》에 《큰 물 지던 날》이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에세이문예사에서 '제1회 민들레문학상'을 받았으며,
부산수필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제 1회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부산문인협회 회원,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이사로 활동 중이고
부산수필가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2013년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되어 첫 수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좋은 수필 쓰는 법 (0) | 2014.04.13 |
---|---|
[스크랩] 백두산 야생화 (0) | 2013.08.19 |
[스크랩] 7월 141호 채장희 / 아버지의 체취 (0) | 2013.07.16 |
[스크랩] 돈 안들이고 고질병 치료하기(백만불 짜리 정보) (0) | 2013.07.05 |
[스크랩] 정호승시인 대표작 (0) | 2013.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