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박귀덕
일제강점기에 개항한 군산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뜬다리’이다.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고 선박에 하역작업이 편리하도록 한쪽은 고정시켜 놓고, 수면의 높이에 맞춰 다리 높이를 조절하게 만든 다리다. 이 다리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될 쌀을 쌓아 놓았던 곳이 장미동藏米洞이다. 해마다 호남지역에서 생산된 쌀 수백만 석이 이곳의 창고와 부두, 옥상, 길거리 등 도처에 쌓였다가 일본으로 송출됐다. 수탈의 상징인 부잔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그 주변의 토막집에서 품을 못 팔면 미곡상에서 볏섬을 추스를 때 떨어지는 곡식을 주워다 연명하며 살았다고 한다.
우리 농토를 갈취하고, 쌀을 수탈해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은 이곳 군산에서 프랑스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 자재를 수입해 지은 유럽풍의 건물에서 부를 누리며 살았다. 옛 군산세관,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의 수단이 되었던 은행들, 일본 무가武家 구조의 포목상이 살던 집, 일본 농장주의 별장 등이 그들의 호화로웠던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근대문화 유산으로 남아있다.
이들 건축물은 「장군의 아들」과 「모래시계」 등의 영화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 건축 자재를 들여와 지은 2층 목조건물은 그 시대에 상상도 하기 어려운 넓은 창과 금고방, 실내화장실 등이 있고, 잘 가꿔 놓은 정원이 있어 평범한 포목상의 집이라 믿기 어려웠다. 농장을 둘러볼 때, 거처로 사용되었다는 통나무집 별장은 백두산 낙엽송에 박석지붕, 실내 장식은 우리의 온돌방과 일본의 다다미, 서구적인 거실 구조가 혼합된 건축물이었다. 거실 천장의 샹들리에나 가구들은 모두 유럽에서 수입한 것들이란다.
여의도 면적의 40배 되는 농장에서 2만 명의 소작농에게 갈취한 부는 호화별장 생활로 이어졌다. 필요에 따라 무한정 찍어 낸 돈으로 고리대금업을 해서 갈취한 농토, 그 농토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하여 부를 축적하고, 초호화판으로 살았다. 그들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 땅의 농민들은 배고프고 서러웠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풍경들을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는 군산시는 그야말로 아픔의 땅 통곡의 땅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시간 속에 빛 바랜 흑백사진 하나가 번개처럼 스친다. 김제만경 넓은 들판에 사시던 내 아버지. 피땀으로 농사지어 놓으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 소달구지에 쌀을 싣고 가는 모습을 가슴 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그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울컥하고 치솟는 눈물을 감출 수 없다. 내 아버지가 겪으신 한 맺힌 삶이 풍경이 되어 생생한 기억으로 마음이 저릿저릿 아프다. 군산의 이영춘 박사가 거처했던 가옥의 앞마당엔 이런 슬픔을 기억하는지 노란 은행잎만 무심히 흔들린다.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는 지난 시절의 이야기에 노란 현기증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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