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묵 추억
이 정 자
엄동설한에 웬 메밀꽃 천지인가. 가까이 보이는 한라산 설국 파노라마에 눈이 부시다. 은빛으로 반사하는 능선이 아름다운 영실 계곡에 고드름 창칼을 높이 쳐들고 오백장군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계곡의 숲에 이마위에 금줄을 두른 설문대 할망의 방그레 웃는 얼굴에 나의 시할머님의 얼굴이 겹쳐진다.
동장군이 위용을 부리는 동짓달 그믐날, 할머님은 승천하셨다. 벌써 돌아가신지 13년, 제사가 다가온다.
할머님은 반농반어 하는 집 외동아들에게 시집가서 2남5녀를 키우셨다.상군 해녀인 할머님은 힘찬 걸음으로 동네를 휘휘 돌아다녔다. 여장부의 가슴에는세상 떠난 두 며느리와 두 딸이 있다. 어려운 시국을 원망하며 가슴속에는 언제나 불덩이가 웅크리고 들어앉았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할머님과의 인연은 같은 마을인 친정동네 우물을 길어다 먹는 이웃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녀가 될 때 까지 할머님은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군 제대를 앞 둔 미래의 남편인 손자에게 거금(그 당시 오만 원)을 주면서, 나하고 맞선을 주선했다. 나는 할머님의 장손 며느리가 되었다.
제주에서 발생한 4.3사건(1948~1954)으로 무력 충돌과 집단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현장에서 여장부의 능력은 대단했다. 당시18살 된 작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름 둔덕에 토굴을 만들고 메밀밭을 경작하면서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동네 집들도 거의 불타 없어지는 참혹한 현실에서도 불빛도 없이 제사를 숨어 지냈다. 들키면 양쪽에서 달려들어 음식과 제기를 모두 빼앗아 갔었기 때문이다. 축사에는 마소가 있었고, 돼지우리에 새끼 밴 암퇘지도 끌고 가는 잔혹함에 죄 없는 백성의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렸다. 그 당시 19살 나이에 시집왔던 큰 며느리는 잔치가 끝 난 다음날 폭도들이 산으로 끌고 가버렸다. 그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 메밀 쌀은 잘 말려 보관해 두었다가 제사 전 날 멍석을 깔고 맷돌에 한숨을 섞어가며 가루를 내고 가는체로 털어냈다. 고운 가루로는 메밀묵을 쑤고, 성긴 가루로는 메밀만두 떡을 만들어 올렸다.
곡류인 메밀은 동부 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 된다고 하는데, 종류에는 조파 말파가 있다. 메밀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곡물이다. 메밀 채(껍질)를 이용한 베게는 머리를 시원하게 하고, 고개를 바르게 받쳐주기 때문에 숙면을 취하는데 효용이 있다고 한다. 또한 유아용 베게로 사용하면 뒤통수가 예뻐진다고 한다.
요즘 메밀가루는 웰빙 음식 만드는 재료로 선호한다. 지방을 분해 한다는 메밀 차의 효능은 압권이다. 꿩 요리 중 특히 탕에는 메밀가루가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 제주의 향토 음식 대표도 빙떡이다. 돼지고기 푹 삶은 국물에 모자반을 넣고 끓이다가 메밀가루를 풀어 넣으면 맛있는 몸국이된다.
산후 조리 음식으로 만드는 메밀수제비는 친정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소고기 다진 것을 끓이다 미역을 넣고, 메밀가루 반죽을 한 수저씩 떠 놓으면 영양 만점의 산후 보신탕이된다.땀을 뻘 뻘 흘리며 맛있게 먹은 수제비 덕분에 모유가 넉넉하게 나온다. 해산할 때마다 친정어머니는 메밀가루로 나의 몸조리를 도와주셨다.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를 감싸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벌써 큰 양푼 가득 수제비를 만들어 놓고 계셨다. 지금도 화사한 얼굴은 친정 엄마 표 수제비 덕분이라 생각한다. 특히 여성들 생리 불순에 효험이 있다한다.
할머님이 살아 계실 때 할아버지의 제사상 음식은 직접 만들었다. 메밀묵은 노련한 솜씨가 필요하지만 할머님은 급한 볼일이 생기면 나더러 메밀묵 쑤고 있으라며 급히 외출을 하셨다. 눈여겨봤던 일이었지만 막상 혼자 묵을 만들어보니 너무 얇아서 속상해 하는 나를 보고, 할머님께서는 “아가야 걱정 하지 마라. 익은 음식이든 선 음식이든 목구멍에 들어가면 마찬가지여.”하시며 안심시켜 주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할머님 모습만보면 마음이 든든했다.
절약 정신이 남보다 뛰어난 할머님은 부엌에 큰 물 항아리를 두고 물이 마르지 않도록 가득 채웠다. 광에는 항아리 들이 즐비했다. 부리가 깨진 작은 항아리에는 여러 가지 곡물 씨를 보관하였고, 큰항아리 부리가 깨지면 오줌항아리로 썼다. 천연 비료인 오줌으로 거름을 했기에 할머님의 텃밭에는 채소가 사철 푸르렀다.
오늘 동문시장에서 제사 음식 차릴 재료들을 구입했다. 할머님 기일이라서 정성들여 메밀묵을 쑬 것이고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고 고기 산적도 만들어 제사상에 올려놓으리라.
우리 집안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신 할머님! 손자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모습들을 지켜보시며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 할머님을 닮고 싶은 나는 미래의 설문대 할망으로 살고 싶은 꿈으로 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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