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큰 감동, 긴 여운
-斗溪 김세명 제2수필집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출간에 부쳐-
김 학[수필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전)]
1. 벗겨 본 수필가 김세명
전라북도 무주 출신인 수필가 김세명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다. 인생의 전반전엔 경찰관으로서 무관(武官)의 길을 걸었고, 후반전엔 수필가로서 문관(文官)의 길을 걷고 있다. 연어처럼 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김세명은 경주김씨 후손이니 엄연히 신라의 왕손이다.
김세명은 1944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원괴목에서 아버지 김갑문(경주 1918~1981)과 어머니 김묘진(김해 1916~1976)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고향 원괴목을 떠나 무주읍으로 이사를 하였고, 무주읍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주농고를 1등으로 졸업하고 경희대학교에 합격하였으나 가난에 발목이 잡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군 사병으로 입대하였다. 공군에서 제대한 뒤 경찰시험에 합격하여 당당히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8남매의 장남이니 집안을 지키며 농사꾼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고향을 떠나 대처로 나가게 된 것이다.
김세명은 1967년 9월 1일 111전투경찰대 근무를 필두로 35년간의 경찰관 근무라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의 공직기간은 떠돌이생활의 연속이었다. 진안, 장수, 무주, 순창, 전주 등지를 떠돌며 성실하게 근무를 하였다. 그가 35년 동안 경찰관으로서 지‧파츨소부터 경찰청까지 옮겨 다니면서 근무할 때 무려 장관표창 등 31회의 표창을 받았고, 2001년 12월 31일 전북경찰청 정보과에서 간부로 정년퇴직할 때엔 녹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었다.
정보과 형사 김세명 경위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나름대로 꿈을 키우고 있었다. 퇴직기념 문집을 내야겠다는 다부진 꿈이었다. 경찰관으로서는 좀 엉뚱한 꿈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정보과 형사는 기자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글을 쓰는 게 주된 임무다. 그날그날 안테나에 접힌 갖가지 첩보와 정보를 선별하여 6하원칙에 따라 보고서를 써야한다. 그런 글쓰기가 김세명의 일과였던 것이다. 그 글쓰기 경험을 바탕으로 수필가의 길로 나가려고 도전했던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마침내 김세명의 꿈은 이루어졌다. 격월간 《수필과 비평》2001년 5,6월호에서 그의 수필 <콩깍지>로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어 대망의 수필가로 등단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경찰관 김세명이 수필가 김세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수필가 김세명은 추진력도 강했다. 등단 4개월 만에 처녀수필집 《업業》을 출간하고 2001년 9월 1일에는 전주상공회의소 5층 강당에서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 식이었다.
8남매의 장남인 김세명! 그는 큰아들로 태어난 뒤부터 잇따라 태어난 동생들에게 매사 모범을 보여주어야 했다. 동생들의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가 진 어깨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그의 키가 작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대추처럼 작지만 단단한 사람이다. 그는 맏아들답게 '나를 따르라 정신'이 몸에 배어있다.
수필가 김세명은 토끼와 발을 맞출 정도의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능히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명문집안을 이루었다. 김세명의 다섯째 동생은 두루 잘 아는 김세웅이다. 민선 도의원을 거쳐 무주군수를 내리 세 번이나 연임하였고, 마침내 전주로 나와서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전주시 덕진구 국회의원으로 당선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세웅 의원은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되었고, 대법원에서 당선무효를 선고받았으니 당사자인 김세웅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큰형인 김세명도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김세명의 동생 김세웅은 자타가 인정하는 대단한 인물이다. 무주군수로 재임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까지 받기도 했으니 그의 집념과 끈기를 알아줄만하지 않는가? 언젠가는 김세명 씨가 다시 권토중래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수필가 김세명!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고희를 목전에 둔 처지인데도 지금 안골노인복지관과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에 다니며 수필공부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좀 엉뚱한 일이지만 젊은 주부들과 함께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여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이따금 주말이면 아들과 며느리, 사위와 딸, 손자들을 초대하여 스스로 만든 요리를 선보이며 가정의 화목을 다지기도 한단다. 수필가 김세명! 그는 비록 키는 작지만 큰 꿈을 지닌 인물이다. 그의 도전정신은 끊임이 없다. 다음에는 또 어떤 변신을 할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2. 김세명 수필의 맛과 멋
만약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음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이번 인생보다 더욱 우둔해지리라
가능한 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짧은 글 긴 여운보다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나선 스테어-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다양한 체험은 다채로운 수필을 빚을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선 스테어의 위 글은 수필가들에게 들려주는 좋은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수필은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히는 문학이다. 수필가라면 육안(肉眼)으로 본 것만을 전부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심안(心眼)으로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다.
무엇을 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직관과 사색으로 그 본 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 영국 작가 Leggett의 이야기는 백번 옳은 말이다. 수필가라면 누구나 귀를 기울여야 할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수필가 김세명은 이번 두 번째 수필집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에서 50편의 작품을 10부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수필가 김세명의 수필은 수필 한 편의 길이가 대체로 200자 원고지 7,8매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짧다. 현대 인터넷시대의 독자들 취향에 맞게 짧게 쓰는 수필가다. 우리나라 수필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윤오영과 피천득의 수필 역시 그들이 남긴 수필은 하나같이 작품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7장 안팎이다. 수필가 김세명은 그 두분의 대가들에게서 본받은 것 같다. 이쯤에서 수필가 김세명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수필이 무언지도 몰랐다. 더더욱 등단이란 절차도 몰랐었다. 2001년 연말이면 강산이 세 번 변한 세월을 뒤로 하고 정년퇴직을 해야 했다. 무언가 정리해야겠다는 절박감에 그간 직장에 들어온 사연과 애환을 풀지 않고는 병이 날 것 같은 생각에 '콩깍지'라는 글을 써서 고하문예관의 최승범 선생님에게 내 놓은 것이 계기가 되어 《수필과 비평》5,6월호에서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홍인호텔에서 가족과 선배작가들의 축하를 받으며 등단패를 받아 수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수필과 나의 인연> 서두
수필가 김세명이 수필과 인연을 맺게 된 내용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수필이 진솔의 문학임을 보여 준 본보기라고 하겠다.
수필은 쓸수록 어렵다. 격에 맞고 제대로 된 수필 한 편을 쓰기란 정말 어렵다. 공부를 하면서 다작을 한다고 동료문인들이 말한다. 그래도 열심히 쓰다보면 신변잡기가 아닌 명 수필 한 편 정도는 건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 쓰고 있다. 정말이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찌 행복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수필과 나의 인연> 결미
수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수필과 인연을 맺었지만 본격적으로 수필공부를 하다 보니 수필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명 수필 한 편쯤 건잘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노력하는 화자의 뚝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나는 가끔 아버지의 빈 지게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늘 일하시던 몸을 뉘여 영면하시니 저승에 가서도 지게를 놓지 않으시려는 것일까. 나는 아버지의 손때 묻은 지게를 무덤가에서 태웠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일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게와 농사일이 떠오른다. 나는 지게를 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의 빈 지게를 생각하며 그때가 그리운 건 왜일까? 봄이면 씨뿌리고 가을이면 거두고 겨울이면 쉬던 단순한 그 시절이 인정이 있고 상부상조하며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었는지 추억해 본다. 그리고 그때가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버지의 빈 지게> 결미
아홉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농사일에 매달렸던 아버지, 8남매를 낳아 부양하려 평생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빈 지게를 떠올리면 아버지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빈 지게를 태운 것은 아버지가 저승에서는 지긋지긋한 그 농사일에서 벗어나시라는 화자의 간절한 뜻이 담겨 있다. 큰아들이기에 다른 동생들보다 일찍부터 아버지의 고생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서도 화자는 그 농경시대의 살맛나는 세상을 그리워한다. 역설 같지만 화자가 인정이 메마르고 기계화된 현대의 삶에 지친 탓일 것이다.
유성(有聲)은 누구나 들을 줄 안다. 빗소리, 자동차소리, 사람들의 말소리는 누구의 귀로도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소리가 안 나는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무성은 심이(心耳)로 듣는다. 마음의 귀, 이성의 귀, 영혼의 귀를 가지고 깊은 소리, 심오한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것이 청무성(聽無聲)이다. 우리는 맑은 영혼의 귀로 양심의 소리, 역사의 소리, 진리의 소리, 지혜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소리 없는 소리가 깊은 소리다.
<청무성(聽無聲)> 중에서
화자의 가보(家寶)가 되었다는 작촌 조병희 선생의 서예작품 청무성(聽無聲)이란 족자를 화소로 한 작품이다. 모든 공직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장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글귀다. 화자는 이 장자의 이야기와 매주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정하고 실천했다는 인도의 사상가 간디 이야기까지 곁들여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 김세명 수필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수필가 김세명은 수필작품의 제목을 잘 뽑는다. <촌놈별곡>이란 작품도 제목이 독자의 시선을 끌만하다.
나는 촌놈이다. 내가 처음 전주에 나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당시 체육교사인 K선생님은 나의 운동모습을 보시고 전북체전에 출전시키겠다며 지도를 하셨다. 시멘트로 만든 역기를 드는 것으로 훈련을 하였다. (중략) 그때 난생 처음으로 도시에 나와 본 것이다. 버스로 무주에서 전주까지 오려면 하루 종일이 걸렸다. 비포장도로에다 아흔아홉 고개인 곰티재를 넘어 왔다.
<촌놈별곡> 서두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에 처음 나왔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 무렵에는 훈한 일이었으니까. 그보다 역도선수가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연습을 하다 전주에 나와서 처음으로 쇠로 만든 바벨을 들어 보았다니 먼 원시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그런 선수가 전북체전 고등부 반탑급 경기에서 우승을 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전북체전에서 우승을 하면 당연히 전국체전에 출전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역도를 그만두어야 했단다. 또 공부를 열심히 하여 경희대학교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포기하고 공군에 입대하고 만다. 그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을 패러디하여 썼다는 <촌놈별곡>이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이제야 알았도다/살아온 세월에 앞서고 뒤처진들/종착역은 하나로세/쏜살같이 지나간 세월 앞에 뒤돌아본들 무엇 하리/바라보니 석양에 남은 해는 댓 발이나 남았구려/남은 세월은 수필이나 즐기며 후회 없이 살아보세
김세명 수필가는 해학적인 수필을 즐겨 쓰기도 한다. <애호박>도 그런 작품의 하나다. 여승들만 있는 사찰에 '개 조심'이란 경고문을 써 붙이는 것은 속인들에게는 겁을 주려는 뜻이다. 하지만 '애호박 손대면 도둑. 주지'란 경고문이 붙여져 있던 이야기로부터 이 작품은 해학적으로 시작한다.
나는 애호박에 남다른 추억이 있다. 공군을 지원하여 친구와 함께 대전의 공군교육단에 입교하였다. 친구는 이름이 '지덕(知德)'인데 별명이 '지털'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음이 났다. 성과 함께 부르면 무슨 욕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성이 '조'씨였으니 그냥 '조지'까지는 미국식 이름 같아서 '조지 워싱턴'과 종씨라고 좋아했지만 끝 글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냥 '지털'이라고 부르면 다정하고 발음하기도 좋았다. 그런데 성과 함께 이름만 대도 웃음보가 터졌다. 그런데 사람이 좋아 '재떨이'로 불러도 조상덕을 본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좋아했다.
<애호박> 중에서
김세명 수필가의 묘사력은 놀랍다. <아침 이슬>의 서두에서 그의 빼어난 묘사력을 만날 수 있다. 시골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묘사가 가능한 것일까? 한 편의 서정시 맛을 느낄 수 있다.
풀벌레가 미세한 날개의 현을 비벼댄다. 높거나 혹은 낮은 소리는 가깝고 먼 거리의 조화로 신비한 우주의 대 합주처럼 들린다. 대금산조처럼 긴 여운으로 가냘프게 끊길 듯 이어지는 대 자연의 향연이다.
<아침 이슬> 서두
새벽에 밥을 지어주시면서 어머니는 너만 믿는다. 네 동생들 잘 거느리려면 형은 국량이 넓어야 된다고 하셨다. 철이 없던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쌀이 귀하여 국이라도 많이 먹어 학교에 보내려고 국량이 크라고 하시나보다 생각했다. 국량이란 말이 마음이 넓어야 된다는 뜻이었음을 성장한 뒤에야 알고 밥상을 대할 때면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중에서
어머니는 늘 언제나 화자에게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는 말씀을 들려 주셨다. 큰아들인 화자에게 거는 기대도 컸고 줄줄이 이어지는 동생들에 대한 당부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화자의 아버지와는 달리 큰아들 김세명에게 아버지처럼 농사를 짓지 말고 도시로 나가 공무원이 되라고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니 수필가 김세명의 오늘은 바로 어머니의 소망에서 비롯된 일이려니 싶다. 화자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던 것 같다.
3. 수필가 김세명이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
이모작 인생을 시작한 두계 김세명은 그동안 수필이란 날개가 있어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고 했던가?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으로 수필에 매진하는 수필가 김세명은 어떤 소재든지 멋진 수필로 빚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 늘 배우는 자세로 문단의 선후배들과 교유하며 오감(五感)으로 수필소재를 찾아 작품으로 빚는다. 한 번 소재를 발견했다 하면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진돗개처럼 물고 늘어진다. 수필가로서 바람직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란 평생을 걸려 '나'라는 집을 짓는 과정과도 같다. 그 집이 완성되면 우리는 무덤으로 들어가고 그 집은 나의 묘비명이 된다고. 또 원로 수필가 김규련 선생은 이렇게 설파하기도 했다.
수필은 시로 쓴 소설이요, 소설로 쓴 철학이요, 언어로 그린 명화요, 뜻으로 부르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수필은 거짓 없는 자화상이다. 미래문학의 주류는 수필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수필이 미래문학으로서 온 문예를 주름잡을 날도 멀지않았다고 한 아나톨 프랑스의 귀띔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더욱 열심히 더욱 끈질기게 수필창작에 매진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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